Monthly Archives: 10월 2011

[김승환 칼럼] 접속의 시대

[김승환 칼럼]

접속의 시대

나는 지금 접속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일상화된 인터넷과 급속히 확산되는 소셜네트워크의 시대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매일 이메일을 읽고, 메시지를 보내고, 트위터를 모니터하고, 페이스북을 관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공식 행사 중에도 살짝 살짝 트위터와 메일을 보고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심지어 같은 방에 있는 친구와도 대화대신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끊임없이 접속을 원하는 사람들. 첨단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우리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주위 세상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왜 휴대전화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고, 소셜네트워크 상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흘러가는 메시지들을 열심히 좇고 있을 까.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인간의 뇌에서 찾을 수 있다. 인지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왜 인간인가>라는 저서에서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뇌의 ‘사회성’에 주목했다. 인간의 특출나게 큰 뇌는 기본적으로 생존과 번영에 관계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달했으며, 원시시대나 현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은 뼛속까지 사회적’으로 남아있다.
한 침팬지 연구에서 관찰된 사회집단의 크기는 55 라고 한다. 반면 인류학자 로빈 던바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대뇌 신피질 크기로부터 유추한 사회집단의 크기는 150 명 정도이다. 실제 기본 전투부대나 비즈니스 단위 등에서 조직적인 계층구조가 없이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의 수 그리고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수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던바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마치 영장류의 털고르기 같이 사회적 관계를 더 효율적이고 광범위하게 연결하기 위해 발달했다. 다양한 연구에서 ‘인간은 깨어 있는 시간 중 평균 80%를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사람들은 잡담하는 가운데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신뢰를 형성해간다. 이러한 소통과 대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간은 고도로 사회적인 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최근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는 더 효율적이고 광범위하게 소통하려는 사람들의 기본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이제 온라인과 소셜네트워크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 집단의 크기는 제한이 없어졌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페이스북의 친구수가 우리 뇌의 구조에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 페이스북 친구가 많을수록 뇌의 회색물질의 양이 많고, 실제 친구도 많다. 보다 실용적인 다른 연구에 의하면 페이스북의 친구가 많을수록 그 회사의 재정적 성과가 더 큰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전신, 전화, 라디오, TV, 휴대폰, 이메일, WWW, 트위터, 페이스북 등등… 점점 더 다양하고 효율적인 소통의 방식이 발명되며, 접속의 의미와 사회적 집단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의 확산과 진화가 계속되면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어떤 모드로 접속하고 있을 까. 최근 공개된 애플 아이폰의 인공비서 시리와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가까운 장래에 휴대전화 건너편의 친구가 인공 지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간다.
뚝. 갑작스런 정전이다. 마치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처럼 답답하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서가에 쌓여있던 책 중에서 아무거나 집어 든다. 아니야. 영화 ‘접속’에서 아련한 추억의 PC통신이 맺어준 사랑처럼 오늘은 밖으로 나가 깊어가는 가을에 젖어봐야겠다.”인간은 컴퓨터 앞에서 삶의 의미를 알아내려해. 하지만 동물은 삶을 살아가려 해. 문제는 인간과 동물 중 누가 더 나은가 하는 거야.”
김승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아태이론물리센터 사무총장/과실연 집행위원장
(** 본칼럼은 10월 24일 한국일보에 실렸습니다.)

[김승환 칼럼] 우울한 ‘노벨상의 계절’

[김승환 칼럼]

우울한 ‘노벨상의 계절’

올해 노벨상은 어느 때보다 화제가 많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 잔치였다. 지난해 김필립 컬럼비아대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문턱까지 갔던 기억은 이제 아스라해지고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올해 노벨 생리ㆍ의학상은 면역 시스템의 비밀을 밝힌 랠프 스타인먼, 브루스 보이틀러, 쥘 호프만 교수에게 돌아갔다. 공교롭게도 이 가운데 자신의 노벨상 수상 업적이 된 과학적 발견으로 암 치료의 길을 연 석학 스타인먼은 수상자 발표 3일 전 췌장암으로 숨졌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풀뿌리 기초과학 저변 넓히고
노벨 물리학상은 특정한 유형의 초신성을 추적해 우주팽창 가속의 비밀을 밝혀낸 솔 펄머터, 브라이언 슈미트, 애덤 리스에게 돌아갔다. 빅뱅 이후 우주의 팽창이 줄어들지 않고 되레 가속된다는 사실은 기존 우주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러한 팽창의 원동력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암흑에너지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암흑에너지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은 이론만 무성하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실수 아닌 실수’인 우주상수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암흑에너지가 만유인력(물체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반대되는 척력(斥力ㆍ두 물체가 서로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해 우주의 팽창을 가속화시킨다고 한다.
한편 노벨 화학상은 준결정을 최초로 발견한 다니엘 세흐트만 이스라엘 공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준결정은 원자의 배열이 유리처럼 완전히 비결정도 아니고 다이아몬드처럼 정확한 결정 형태도 아닌 중간 상태로 기존의 고체 구조와는 전혀 다른 물질이다.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진 않지만 기묘한 질서 패턴이 숨어 있어 회절 무늬를 보면 5각형 대칭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발견 당시에 관련 논문 출판이 거부되고 동료들로부터 ‘미친 소리’로 여겨지는 등 커다란 파장을 낳기도 했다.
이들 노벨상 수상자의 공통점은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애플의 창업자이자 혁신가인 스티브 잡스가 시작한 ‘Think Different’ 캠페인이 생각난다. ‘여기에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 속의 천재성을 본다.’ 이 캠페인에는 밥 딜런, 마틴 루서 킹, 토머스 에디슨,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등장한다. 개구리를 공중 부양해 ‘괴짜’ 이그노벨상을 수상하고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한 창의적 발상으로 그래핀을 만들어 2010년 노벨상을 수상한 안드레 가임을 비롯한 수많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다.
창의적 연구 환경 만들어줘야
한국인 수상 전망은 암울하지만 노벨 과학상의 원동력은 기초과학의 저변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노벨의 계절을 마무리하자. ‘노벨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지난 1917년 막스플랑크연구소를 벤치마킹해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하고 기초과학에 집중 투자한 지 40여년 만에 유가와 히데키가 노벨 물리학상을 처음 수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우리나라는 이제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기초과학연구원을 설립하는 등 국가적으로 본격적인 기초과학 투자를 시작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중장기적 안목으로 우수한 젊은 과학자들을 발굴ㆍ육성하는 한편 풀뿌리 기초과학의 저변을 넓히고 기초과학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강화해나가야 한다. 젊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마음껏 창의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뒤 강태공처럼 진득하게 기다려주자. 노벨의 길에 왕도는 없다.
김승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아태이론물리센터 사무총장/과실연 집행위원장

(** 본칼럼은 10월 21일 서울경제에 실렸습니다.)

[이홍금 칼럼] 남극은 우주과학의 전진기지

[이홍금 칼럼]

남극은 우주과학의 전진기지

올해는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당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많은 탐험가들이 남극과 북극으로 탐험을 떠났다. 그들의 경험과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극지과학과 탐사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남극점에 아문센보다 늦게 도착한 영국의 스코트는 귀환 도중 숨진 불운의 탐험가였다. 하지만 그는 최후까지 기록하고 남극연구를 위해 운반한 여러 자료들 때문에 여전히 위대한 탐험가로 존경받고 있다. 새로운 리더십 모델인 세클턴은 탐험선 ‘인듀어런스’호가 얼음에 갇히면서 2년간 남극에 갇혀 있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전 대원을 무사히 귀환시킨 탐험가로 기억되고 있다.
2008년 4월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우주생물학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편도 화성탐사 여행, 다시 말하면 현재의 기술로는 화성에서 다시 우주선을 발사해 지구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전제 하에 화성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학회장에 있던 100여 명의 청중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우주를 향한 유인 탐사는 인류역사에 위대한 탐험가로 남게 될 도전자들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우주인들은 오랫동안 밀폐된 우주선에서의 고립감, 고독,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다른 대원들과의 갈등과 화합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우주인들은 긍정적인 사고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 원만한 대인관계, 심리적 안정감, 그리고 성취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극지 생활을 오래할 대원들이나 6개월 이상의 남극 항해를 하는 승조원이나 연구원에게도 해당된다. 극지나 우주에서 산다는 것은 지구에서는 겪어보지 못하는 전혀 다른 환경에 던져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성공은 도전 정신을 가진 적합한 성격을 가진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화성과 태양계 내의 행성 및 위성 탐사를 위해 지구의 극한 환경에서 여러 탐사활동이 진행 중이다. 다산과학기지가 있는 북극의 스발바르 기지에서는 미국 NASA, 유럽 ESA, 카네기 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화성과 유사한 지구 육상 환경에서 행성 탐사와 데이터 수집을 훈련 중이다. 2007년에는 북극에서 약 1,500km 떨어진 캐나다 최북단 데번 섬의 빙하 위에 화성탐사기지가 설치돼 100일간의 성공적인 기지 생활 모의실험이 이루어졌다. 또 우주정거장 실험 등 우주탐사 계획에 선진국과 신흥국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인듀어런스(ENDURANCE)는 극한 환경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잠수 로봇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얼음으로 덮인 남극 호수에서 자체적으로 이동하며 생지화학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3차원 지도를 작성할 수 있다. 2008년과 2009년 남극 맥머도기지 주변 드라이밸리의 호수 전체에서 데이터를 수집했는데, 궁극적으로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의 대양 탐사에 활용될 계획이다. 2014년에는 보다 개선된 잠수로봇인 ‘ENDURANCE-L’가 남극 얼음 밑 바다를 탐사할 계획인데 이를 통해 빙하와 바다의 경계면 생태계 등을 조사할 예정이다.
2014년에는 남극 대륙에 장보고 과학기지가 세워진다. 기후변화와 지구시스템, 실용가능한 분야에 대한 국제 수준의 연구 활동으로 국격을 높이는데 한층 더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아울러 남극대륙 연구를 위한 우리나라의 첨단 탐사기술과 장비개발은 장차 전개될 방대한 규모의 우주과학과 우주산업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홍금 극지연구소 소장/과실연 회원

(** 본칼럼은 10월 10일 한국일보에 실렸습니다.)

[박행순 칼럼] 의료 후진국 네팔의 새로운 시도

[박행순 칼럼]

의료 후진국 네팔의 새로운 시도

지난 8월 전남대학교에서 은퇴하고 곧바로 네팔의 파탄의대에 객원교수로 왔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의료 혜택이 전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네팔은 한층 더 심각한 것 같다. 이곳은 세계 10대 고산 중 8개가 있고 남부의 평야(Terai)를 제외하고 거의 산악지대이다. 수도인 카트만두 밖은 대부분 지형적 고립과 경제적 고립으로 인해 의료 사각지대가 되었다.
1970년대 말까지 네팔에는 의사를 양성하는 교육시스템이 전무했지만, 지금은 매년 2000명에 달하는 의사를 배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카트만두에 정착하거나 해외로 나가기 때문에 의료 사각지대는 줄어들지 않는다. 수도에서는 한 사람의 의사가 주민 1330명, 산지를 포함하는 시골에서는 3만1000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시골 주민의 평균 수명은 수도권 사람들보다 20∼30년이 짧다. 시골이 수도보다 의사 1인당 주민수가 23배 이상 많고 평균수명이 20∼30년 짧다는 사실은 의사수와 평균수명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팔에는 지난 50년간 세계 각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사랑과 박애 정신에 따라 파탄병원(Patan Hospital)을 운영해왔다. 최근에 신설된 파탄의대(Patan Academy of Health Sciences)는 파탄병원을 인수하여 설립되었다. 현재 이곳에서 기독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정신과 비전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 보인다. 파탄의대는 가난하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의료혜택을 주는 것, 즉 네팔의 지역 간 의료 혜택의 격차를 줄이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하여 어떤 정책으로 학교가 운영되고 교육이 이뤄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대학에서는 첫째, 학생들의 절반 이상을 의료 사각지대에서 장학생으로 선발한다. 둘째, 총 6회의 현장실습이 필수이며 이는 지자체와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진다. 모든 학생들은 슬럼 지역을 포함하여 다양한 곳에서 수일 또는 수 주간, 그리고 마지막 학기에는 6개월의 실습을 마쳐야 졸업자격을 얻게 된다. 셋째, 소그룹의 사례(문제)중심 토론 학습(Problem Based Learning)이 활성화되어있다. 넷째, 학생들이 실력 있는 의사가 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의료보건 분야에 지도자가 되도록 교육한다.
6년 교육을 마치면 장학금 수혜자들은 배정받은 의료 사각지역에서 2∼4년간 의무적으로 지역민들을 위하여 의사와 지역의 의료 보건 분야의 리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후에야 졸업장을 받게 된다. 그들이 단지 의무 기간만 마치고 카트만두에 돌아올지 계속 그 지역에서 활동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지만 기간에 상관없이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평생 가난한 환자들을 전심을 다하여 사랑으로 돌본 우리나라의 성산 장기려 박사(1911∼1995)를 역할 모델로 소개하고 싶다. 파탄의대가 지향하는 교육이념에 따라 네팔인 장기려들이 각 곳으로 흩어진다면 이는 네팔의 의료 사각 지대를 해결하는 탁월한 대안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많은 나라가 배워야할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신설대학의 구체적 비전 때문에 나는 오늘도 파탄의대를, 그리고 네팔을 희망으로 바라본다.
박행순 네팔 파탄의대 객원교수·사단법인 국제과학문화협회 대표·과실연자문위원
(** 본 칼럼은 2011년 10월 5일자 광주일보에 실렸습니다.)

[곽재원 칼럼] ‘577계획’ 마무리 잘 짓자

[곽재원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577계획’ 마무리 잘 짓자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나왔다. 예산은 정책의 방향을 화폐량이라는 냉철한 기호로 표시한 것이다. 매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예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원배분의 우선순위를 정해 정부 활동을 선도한다는 점에서 보면 예산은 ‘정치가의 지갑’이다. 그런가 하면 실질적 정책기능과 구체적인 시행과정을 관료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선 ‘관료의 지갑’이다.
 예산의 골격이 정치권력의 정치지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그 내용은 관료의 집단논리로 채워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산이 명실공히 민생을 챙기는 ‘국민의 지갑’이 되기 어려운 구조다. 더구나 단년도 예산구조이다 보니 그 라이프사이클마저 짧아 장기 국책을 담기가 어렵다. 매년 ‘고용예산’이다, ‘복지예산’이다 하며 시류에 맞춰 특징짓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예산에서 유독 긴 고성장 라이프사이클을 가진 게 있다. 과학기술예산이다. 국가경쟁력을 키운 일관성 있는 과학기술정책을 가능케 한 것이다. 다른 분야보다 정치와 관료의 길항(拮抗)작용이 훨씬 적다는 점도 있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공통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정부의 과학기술예산은 문민정부(1993~97년)동안 1조2000억원에서 3조원으로 연평균 26.6%씩 늘었다. 국민의 정부(1998~2002년)동안에는 연 15.1%씩 늘어 3조3000억원에서 6조1000억원으로 급신장했다. 참여정부(2003~2007년)는 6조5000억원에서 9조8000억원으로 연 10.6%씩 늘렸다. 이명박 정부(2008~2012년)는 11조1000억원에서 16조6000억원으로 연 10.8%씩 늘린다는 계획이었는데 거의 달성하고 있다. 이번 정부는 정부예산 10조원대에 진입해 매년 두 자릿수 신장률을 지켰고, 특히 2008년 9월 리먼 쇼크(세계 금융위기) 이후에 더욱 예산 확대에 힘을 쏟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정부는 내년도 과기예산을 올해 14조9000억원에서 16조원으로 늘렸다. 첨단 수출제품에서 선진국에 약점을 보여 온 에너지·환경과 우주항공·건설교통 부문을 강화하면서 국가 비전인 녹색성장을 위해 신성장동력과 녹색기술 연구개발 명목으로 5조원 이상 집중 투입한다. 연구개발 예산의 절반을 기초 및 원천연구에 쏟는다는 당초 목표도 그대로 담았다.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2008년 8월에 내놓은 과학기술기본계획인 이른바 ‘577 계획’(국가 연구개발비 GDP 5%, 7대 중점분야 육성, 세계 7대 과학기술 강국)에서 명시한 정부의 약속을 지키는 셈이다. 지금부터는 결과와 지표관리가 정책의 키워드다.
 여기서 가장 큰 과제는 민간 연구개발 투자다. 2010년 국가 전체로 43조9000억원(민간 31조6000억원), 올해 50조원(민간 약 35조원 예상), 내년도 64조원(민간 약 49조원 목표)으로 봤을 때 민간투자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으면 ‘GDP 5%’ 달성은 어렵게 된다. 원자력, 고속철도, 스마트시티 등 인프라 수출과 중소기업 상생 프로젝트, 지역산업 클러스터 등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게 관건이다. 정부는 연구개발비가 늘어나고 녹색성장 정책이 자리잡아 가는 데 따라 민간부문에서 다양한 연구개발 인력과 새로운 녹색 일자리 확보에 나설 수 있도록 종합적인 인센티브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 20년간 예산 증가 일변도의 과학기술정책을 재점검해 보는 것도 지금이 좋은 시점이다. 과기예산이 GDP 비율로 세계 3위지만 총액은 선진국에 한참 뒤진다는 종래의 주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기업연구소의 연구원 수가 23만5000명(이 중 중소기업은 14만 명)을 넘고, 연구소도 2만1000개(이 중 중소기업은 2만 개)를 돌파해 양적 성장은 했으나 질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국가 연구개발의 본산인 출연연구기관의 역할과 기능은 어떤 지향점을 갖고 변화해 왔는지, 대학의 논문 수 팽창과 우수 논문 수 빈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만년 기술무역수지 적자국(2009년 48억5600만 달러 적자)으로 매년 주력 산업에서 적자 규모가 크게 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등의 분석은 좋은 교재가 될 것이다.
곽재원 중앙일보 대기자(과실연 집행위원)

(** 본 칼럼은 2011년 10월 4일자 중앙일보에 실렸습니다.)